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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노동 - 주부는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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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담소 댓글 0건 조회 2,901회 작성일 06-07-2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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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노동 - 주부는 괴롭다]

 한국식 가사노동, 품이 너 무 많이 든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주부는 며칠 전 저녁 9시경 퇴근했다. 놀이방에서 20개월 된 아이를 찾아와 등에 업고 수퍼마켓에 들렀다. 퇴근한 남편과 이곳에서 합류했다. 장을 본 뒤 집에 들어오니 9시 반. 땅으로 꺼질 것처럼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저녁은 간단히 모밀국수로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국수를 삶고 무즙을 만들고 양념을 준비하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평소 ‘나 몰라라’ 하던 남편도 이날은 미안했는지 아이를 대신 재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고 간단히 정리를 하고 나니 자정녘이 됐다.

그는 “남편에게 불만은 없지만 이렇게 주부의 희생이 클 줄 알았다면 40살 넘어 결혼했을 것”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만이라도 집안일에서 해방돼 책을 읽는 게 그의 꿈이다. 그는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순간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질 때가 있다”고 한다.

집안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막상 하고 나서도 일한 표시가 잘 안 난다. 청소나 설거지 같은 ‘가사노동(House Work)’에서부터 육아나 노인 부양 같은 ‘돌봄 노동(Care Work)’에 이르기까지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가. 가족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과 책임감으로 버티기엔 그 일의 절대량이 너무 많다.

소위 전업주부라고 불리는, 집안에서 일을 하는 여성들을 보자. 그들은 수많은 업무를 척척 해내는 만능 해결사에 가깝다. 자녀의 가정교사, 운전사, 요리사, 회계사, 청소부, 엔터테이너…. 가정의 CEO, 그것도 평생 무보수인 CEO인 셈이다. 이러니 전업주부들이 “넌 집에서 놀잖아”라는 말에 상처받고 기분 나빠하는 게 당연하다.

집 밖에서 일한다고 집안일에서 면죄부를 얻지도 못 한다. 맞벌이 부부가 나란히 퇴근하면 남편은 쉬고 아내는 그때부터 집안일을 하는 게 현실이다. ‘빵점 엄마’ ‘불량 주부’로 체념하고 살자니 미안하고, 그래서 바둥거리며 기를 써보지만 일과 가사, 양육 모두를 잘 해내기란 너무 어렵다.

서점엔 초보 주부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겠다면서 ‘살림하는 법’ ‘청소하는 법’ 같은 책자가 나와 있는가 하면 육아휴직제 활성화 방안 등 정부의 지원책도 쏟아진다. 여성계에선 “가사를 여성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말고 남성이 적극 도와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육아나 노인 부양의 부담을 국가와 기업, 사회, 개인이 나누기 위한 방안도 제시된다.

하지만 이 땅의 주부들은 오늘 이 순간에도 쉬고 싶다. 자녀가 공부 잘하고 남편이 돈 잘 벌어다 주는 게 인생의 행복이라지만 커피 한잔을 곁들이면서 책 읽는 여유가 절실한 것도 사실이다.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이윤석 교수는 “육아나 노인 부양에선 사회의 책임론이 얘기되지만 가사노동은 전적으로 한 가족의 책임으로 간주된다”라며 “한데 너무 여성에게만 부담시키니까 일 자체를 줄이거나 가족 구성원 간의 배분 쪽으로 문제해결 방안이 논의돼 왔다”고 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최근 “불면증을 앓는 7000만명 가까운 미국인 중 상당수가 일과 아내·엄마의 역할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여성들”이라는 내용의 커버스토리를 다뤘다. 이렇듯 주부의 어깨가 무겁기는 외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주부에게 주어지는 부담이 더하다.

우선 음식부터가 서양 음식에 비해 주부의 일손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주부들은 “하루 세 끼를 제대로 차려먹으려면 밥 해먹고 치우는 일만으로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고 한다.

스파게티 같은 서양 음식은 차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짧고 먹은 뒤 치우는 것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반면 한국 음식은 준비 과정도 까다롭고 품이 많이 든다. 잡채를 예로 들자면 우선 시금치를 일일이 다듬어 흐르는 물에 씻은 뒤 데치고 별도의 양념을 해놓아야 한다. 버섯, 달걀 지단, 양파, 목이버섯, 고기는 각각 따로 볶거나 준비한다. 당면은 찬물에 불려뒀다가 물에 끓인 뒤, 간장과 설탕, 깨소금으로 버무려 볶는다. 준비해 놓은 갖은 야채들을 넣고 버무린다. 이렇게 품이 많이 들지만 결국 식탁에 올려지는 건 한 접시다. 시래기 국을 만들려고 해도 시래기를 산 뒤 잘못 말리면 곰팡이가 생기니까 데친 다음에 말리는 등 보통 손이 가는 게 아니다.

야근도 하고 회식도 하지만 아침 식사만큼은 꼭 차린다는 30대 주부는 오전 7시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식초, 참기름, 깨소금, 마늘, 파를 다지고 뿌려서 양념간장을 만드는 데에만 5분 가까이 들어요. 아주 간단한 걸 준비해도 최소 20~30분은 걸리죠.”

물론 인스턴트 식품으로 간단히 식사하고 외식을 즐기는 가정도 늘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 먹는 ‘집 밥’에 대한 신화는 여전히 주부에게 부담을 안겨준다. “대충 식사를 때우려다가도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면 망설이게 된다”고 주부들은 말한다.

몸에 좋다는 유기농 제품이나 웰빙 제품이 인기라고 하면 이런 걸 일일이 해먹지 못하는 맞벌이 주부들은 주눅이 들게 된다. 그렇다고 멸치 같은 천연 재료를 말리고 빻아서 만든 천연 조미료를 챙겨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 강남의 한 주부는 “옆집 엄마가 ‘돈가스 소스를 직접 만들어 먹인다’고 하면 그냥 듣고 흘리려고 해도 ‘나는 무얼 하고 사나’ 싶어진다”고 했다. 학교 급식과 관련해 대형사고라도 터지면 주부의 한숨 소리만 커간다.

한식은 상차림을 할 때 필요한 그릇 수도 많다. 요즘은 식기 세척기를 많이 쓰지만 접시와 달리 오목한 그릇들을 일일이 다 세척기에 넣을 수도 없다. 집안 청소도 우리나라에선 좀더 손이 많이 간다. 진공청소기를 쓰는 입식문화 중심의 서양과 달리 우리는 좌식 문화라서 마루나 방 바닥을 물걸레질 해야 한다. 한 주부는 “요즘 스팀청소기를 쓰는 덕분에 과거보다 편해지긴 했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직접 손걸레질을 해야 할 때가 많다”고 했다. 빨래도 세탁기가 대신 해준다고 하지만 아직도 가족의 속옷이나 걸레 등은 직접 삶는 주부가 많다.

요즘은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하느라 일거리가 더 늘었다. 한 주부는 “고생해서 분리수거를 하는데 실제 제대로 재활용되지 못한다는 보도를 접하면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집안일이야 사실 대충 해놓고도 지낼 순 있다. 하지만 교육열이 높은 한국의 엄마들에게 아이 문제는 양보나 타협이 불가능한 주제다. 서너 살짜리 자녀를 영어학원 두 곳과 미술학원, 음악학원에 이끌고 다니는 것이야 학부모의 선택 사안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공교육이 실제 엄마의 손을 너무 필요로 하게끔 운영된다는 데에 있다.

직장 여성은 “일하는 사람은 대체 아이를 키우지 말거나 직장을 그만두라는 말이냐”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로펌의 변호사인 한 여성은 “파김치가 돼 퇴근하면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숙제를 돕느라 한두 시간씩 보낸다”고 했다. 준비물로 씨앗이나 곡식을 가져오라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란다. 요즘 학교 옆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세트로 만들어 팔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주어지는 숙제 수준이 간단치 않다. 그는 “포스터컬러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코팅하고 일일이 가위로 잘라오라고 한다”며 “아이가 아니라 엄마들을 상대로 숙제 검사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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